목양편지 E BLASTER
[] (2024년 3월 27일) 우리가 베드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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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주간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베드로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 다른 대상과 각자의 관점과 스타일로 예수님을 보여주기에, 강조하는 이야기들이나 담고 있는 내용도 조금씩은 다릅니다. 하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이 네 복음서에서 다 말하고 있는 것들은 그만큼 예수님의 삶과 복음의 메시지에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든 복음서가 다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며 배신하는 이야기도 모든 복음서에 다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이야기 안에서,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관점입니다. 그 관점은, 아무리 장담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수제자라 해도, 우리의 힘으로는 주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연약하고 두려움으로 가득 찬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 번 경고하셨습니다. 교만하지 말라고, 내가 너를 기도하고 있다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가지 말라고. 어느 정도 말하셨냐면, 베드로가 3번 부인할 것까지도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능력을 지금까지 보고 왔다면, 어느 정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있다면, 그 예수님 경고 앞에 겸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르고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치지 않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오직 한가지로 충만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다른 제자들과 달라. 나의 열심과 열정과 의지는 예수님을 향한 충성으로 보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금방 무너졌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서 기도하지 않을 때 벌써 무너졌습니다. 용감하기는 했지만, 대제사장의 집안에서 바깥에서 불을 쬐며 다른 종들과 함께 섞이려고 할 때, 그는 무너졌습니다. 결국 그런 환경과 무지함은 종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그리고 세 번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마태복음 26:74절에는,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한 목사님은 베드로가 욕까지 섞으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았을까 상상해 봤다고 합니다. 수제자가 가장 연약한 실패자가 됐습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또다시 베드로를 직면하며,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바라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크리스천의 행복과 비결이 이 말씀에 미리 하셨는데, 우리는 왜 이 경고와 지혜를 외면하는 것입니까? 결국 내 힘으로는 이 삶을 살 수 없는데, 왜 깨어서 기도하지 않고, 나의 편안함을 선택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살고, 타협하며, 비겁하게 주님을 등지며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해답은 주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이것을 아시면서, 죽음으로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아주 많이 묵상하는 한 주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심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런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ANC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 주 주님과 가까이 지내시고, 부활절에 기쁨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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